*시빌.워 이후
*스포 다량
*마블 초보주의
소코비아 협정은 유야무야 됐다. 2년 전쯤 완다 등이 수중감옥을 탈출했을 땐 무슨 빈.라덴이라도 살아 돌아온 것처럼 난리들이었지만 그 후 그들이 지명수배된 채로도 몇 번의 테러를 막아내자 급속도로 여론이 바뀐 것이다. 게다가 협정을 주도했던 와칸다가 발을 빼자 다른 나라들도 슬슬 말을 바꿔 지금은 폐기된 거나 마찬가지. 많은 나라에서 수배도 거의 풀린 상태다.
여기서 '거의'라는 건 다는 아니라는 뜻으로, 그들은 몇몇 국가에서 아직 범죄자였고 그 중 하나가 미.국이었다. 고국에서 거부 당하는 히어로라니. 아이러니하지만 여론이 워낙 어벤져스 쪽으로 기울어서 정부도 오래 버티긴 힘들 것이다.
히어로가 돌아오는 거다. 모두가 반기진 않겠지만.
**
페퍼는 히어로라면 진절머리가 났다. 멀리서나 멋있지, 가까이 있는 사람에겐 그거 왓더헬이다. 갑자기 집이 무너지질 않나, 납치 당해 실험실 개구리꼴 나지, 가끔 애인을 티비에서 만나기도 한다. 아령 대신 도시를 들고 있는 애인을 말이다. 게다가 그 애인이 토니 스타크라면 상황은 더 최악이 된다. 그는 죽어간단 말을 하는데도 사흘 밤낮이 필요한 머저리니까.
소코비아 사태 이후 페퍼는 더 견딜 수가 없었다. 토니는 억만장자에 천재 공돌이지만 슈트가 없으면 운동 좀 한 일반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슈퍼 히어로도 넘쳐 나는데 세상을 구할 때마다 트라우마를 훈장처럼 달고 오는 아저씨까지 머릿수를 채워야 하나. 하지만 토니는 끝내 슈트를 벗지 못했고, 페퍼는 결국 당분간 거리를 두자고 했다. 한 마디 잡지도 못하고 어깨만 축 늘어뜨리는 뒷모습에 쓴물이 올라왔지만 단호하게 돌아섰다. 그리고 기다렸다. 소코비아 협정, 어벤져스의 분열과 대립, 캡틴 등의 지명수배를 지켜 보며 몇 번이나 연락하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오만이었다. 그가 자신을 포기할 리 없다는 오만.
수중감옥 탈출로 한창 떠들석할 때 비전에게 연락이 왔다. '..미스 포츠. ..죄송하지만 잠깐이라도 좋으니 A타워에 들러주시지 않겠어요.' 토니는 바에 앉아 더티 마티니를 마시고 있었다. 토니..하고 부르자 천천히 돌아보던 순간을 페퍼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천하의 토니 스타크가 그런 눈을 하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양 무릎 아래가 철로 변한 로디(그에 대한 뉴스가 나오지 않아 페퍼는 로디의 사고를 몰랐다.)와 자비스의 목소리를 똑닮은 비전에게 뒷얘기를 듣고도 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로디는 토니의 유일한 친구였고 어벤져스를 그가 그만의 방식으로 좋아하고 아꼈다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그 눈빛은 지나쳤다. 페퍼는 자존심이고 뭐고를 따질 때가 아니라는 걸 직감하고 다시 토니 곁으로 돌아왔다.
토니는 언제 그랬냐는 양 활달하게 움직였다. 로디의 부상을 계기로 재활사업에까지 영역을 넓혔고 소코비아 수정안과 멤버들의 신원복구를 위해 일주일에 여덟 번씩 비행기를 타기도 했다. 술에 절어 있지도, 하루가 멀다하고 슈퍼모델을 침대로 끌어들이지도, 한 달씩 랩에 처박혀 있지도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멀쩡하고 침착했다. 전적이 전적인지라 한참을 지켜보던 페퍼가 다 안심할 만큼.
5개월쯤 지났을 때 페퍼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토니는 괜찮아졌고 원하던 대로 다시 아머를 입지도 않았지만 그들 사이의 달콤함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페퍼는 마지막으로 토니를 찾아 감정이 남은 것 치고는 꽤 쿨한 작별인사를 건넸다.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원나잇 상대 치울 때는 빼고.
순간 토니의 입술이 스치듯 쓸쓸하게 호선을 그렸다. 그땐 그게 자신의 미련인 줄 알았다.
-당신은 내게 과분한 여자였어. 하지만 잘 가라곤 못하겠는데.
-내가 사준 백을 내놔, 라고 할 건가요?
-아니. 더 많이 사라고 할 거야.
토니는 다시 CEO 자리를 제안했다. 자긴 편하게 공돌이 하면서 가끔 얼굴이나 비치겠다고.
-..혹시 또 죽어가요?
-오, 달링. 그랬다면 오믈렛이 있었겠지.
-......
-고민하지 마. 우린 좋은 사업 파트너잖아.
-보모가 맞겠죠.
-월급으로 스타크 인더스트리가 부족한가?
-한참.
-좋아. 포츠 인더스트리로 바꿔도 울지 않을게.
-진심이에요?
토니는 당장 변호사를 부르려고 했고 페퍼는 당신 이름으로 백만장자가 되겠다며 수락했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났을 때. 그녀는 혀를 깨물 만큼 후회했다. 대표 자리를 넘기자마자 토니가 회사 얼굴에 먹칠을 해서 페퍼가 가지고 있던 백마저 다 팔게 만들었냐면 그건 아니었다. 그는 명예이사, 그의 표현으론 얼굴마담 역활을 톡톡히 해냈고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주가는 연일 상승했다. 페퍼의 사업능력과 스타크의 이름값+공돌이 능력은 최강의 조합이었다.
그 일은 모든 게 좋았을 때 일어났다. 페퍼 체제는 성공적이었고 (몇몇 이사는 포츠만으로도 충분하다며 오만하고 즉흥적인 스타크를 아예 회사에서 내치자고 했다가 실업급여나 받게 됐다.) 로디는 강철 다리를 자기 것처럼 움직이게 됐으며 어벤져스 수배해제는 코앞이었다. 페퍼는 여느 때처럼 로스장관을 백 번쯤 욕하다가 커피잔을 깨먹은 더미를 구박하는 홀로그램 속 토니에게 주의를 주고 -애 좀 그만 울려요- 중.국 출장에 집중했다. 일정은 눈 코 뜰 새 없이 빠듯했다. 마지막 밤이 되어서야 개인 핸드폰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음성 메세지 1개. 듣지 않아도 토니였다. 믿기지 않지만 이 구식 핸드폰을 준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까. 첨단기술의 선두주자께서 이딴 골동품을 선물이라고 주고 종종 메세지를 남겼다. 내용은 주로 치즈버거에 관한 거였다. (내가 아직도 당신 비선 줄 알아요?! 는 씨알도 안 먹혔다.) 페퍼는 이번에도 치즈버거면 햄버거 가게를 백 개쯤 사버리겠다고 이를 갈며 버튼을 눌렀다.
[...미안해.]
페퍼는 벌떡 일어났다.
[프라이데이가 설명해줄 거야. 부수진 말아줘. 당신 주먹은 너무 세. 비전을 부탁해. 똑똑하지만 아직 애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어. 그리고 전해줘.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고마웠어 페퍼. bye.]
미친듯이 뛰는 심장을 누르고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미스 포츠.]
프라이데이였다.
-...토니는.
[......]
-프라이데이!! 토니는!!
[잠들어 계십니다.]
마이 갓... 신음하듯 중얼거리는 페퍼에게 프라이데이가 침착하게 덧붙였다.
[진정하세요. 아직 돌아가신 건 아닙니다.]
-..아직?
[전화로 말씀드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자세한 건 돌아오면]
페퍼는 당장 전화를 로디에게 돌렸다.
[페퍼, 출장 중 아니]
-지금 토니에게 가주세요. 빨리!!
로디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슈트를 입었다.
온갖 안 좋은 상상 속에서 도착한 말리부 저택은 조용했다. 날듯이 랩으로 뛰어 내려간 그는 맥이 풀려 주저앉았다. 강화유리에 비친 토니가 태연하게 홀로그램을 보고 있던 것이다.
-갓뎀.. 갓뎀 토니 스타크!! 페퍼까지 짜고 날 엿먹이다니!
수도승 생활이 질릴 때도 됐다고 생각은 했지만 질이 나빠도 너무 나쁜 장난이었다. 로디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나 돌아보지도 않는 저 뒤통수를 장렬히 후려치리라 씩씩대며 보안번호를 눌렀다. 그런데.
-...뭐야...
눈 앞의 토니가 사라져 버렸다. 토니 뿐만이 아니라 온갖 장비로 가득차 있던 랩이 거짓말처럼 깨끗해졌다. 내가 미친 건가.. 로디는 제 뺨을 찰싹 내리쳤다. 하지만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다급히 핸드폰을 꺼냈다.
-페퍼.
[가고 있어요. 토니는요?]
-이게 무슨...
-안녕하세요, 미스터.
불쑥 끼어든 프라이데이가 친절히 말을 이었다.
-당황하지 말고 숨을 길게 뱉으세요. 하나, 둘, 셋..
[무슨 일이에요!]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프라이데이가 숨을 쉬라는데.. 잠깐. 잠깐만. 프라이데이?
-예. 미스터.
-내가 올 걸 알았나?
-예상된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토니가 예상했다는 거다. 로디는 심장발작 직전인 페퍼를 진정시키고 최대한 침착하게 프라이데이에게 물었다.
-왜 내가 올 거라고 생각했지?
-미스 포츠가 연락하실 테니까요.
-토니가 그랬나?
-예. 미스터.
로디는 마른침을 삼키고 마지막 질문을 했다.
-토니는 어딨지.
**
캄캄한 밤. 말리부 저택에 한 그림자가 찾아 들었다. 경비 시스템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림자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저택은 조용했다. 마치 폐가처럼. 그림자에게서 가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무래도 스타크에게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안정을 되찾아 가던 그들에게 티찰라의 한 마디는 파장이 컸다.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이름. 완다는 눈에 띄게 불안해 했고 샘은 코 끝을 쓱 닦으며 고개를 돌렸다. 클린트는 특히 더했다. 수중감옥에서 토니에게 퍼부어 댄 걸 잊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스티브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시베리아에서의 일을 하루하루 곱씹으며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동아줄처럼 쥐고 살았다. 티비에서 보이는 토니의 멀쩡한 모습은 그나마 작은 위안이었다. CEO에서 은퇴한 이후로는 자주 볼 수 없는 게 아쉽긴 했지만 여전히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는데... '행적이 석연치 않아. 국내에서도 의심하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더군.' 얼마 후 토니 스타크가 건강상의 이유로 자택에서 요양 중이라는 스타크 사의 공식 보도문이 나왔을 때 스티브의 인내심은 바닥이 났다. 그래서 이성적인 캡틴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 수배가 풀리지 않은 조국에 발을 들이는 일을 하고 있는 거다.
티찰라의 도움으로 두 시간을 얻은 스티브는 다급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잠재웠다. 얼굴만, 얼굴만 보고 오는 거야. ..아니. 목소리까지만. 그래, 목소리까지만 듣자. 랩으로 한 발 한 발 내려갈수록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전시하듯 유리로 둘러싸여 있던 랩에 커튼이 쳐져 있었다. 스티브는 랩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1년 8개월만이었다. 그를 볼 수 있는 것이. 그리고 조심히 커튼을 잡았을 때.
띠리리리, 띠리리리.
스티브의 구식 핸드폰이 크게 울렸다. 스티브는 꺼야 한다는 생각도 못한 채 핸드폰을 내려다 봤다. 이 번호를 아는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그럼 그가 지금 저 안에서..
-역시 당신이었군요.
날카로운 목소리에 스티브는 번쩍 정신을 차렸다. 돌아보자 늘씬한 금발 미녀가 서 있었다. 아는 얼굴이었다. 페퍼 포츠. 페퍼는 핸드폰을 끊으며 다가섰다.
-이런 골동품을 가지고 있을 사람은 캡틴밖에 없을 것 같았죠.
-..미스 포츠. 그걸 당신이 왜..
-돌려 주려구요.
페퍼는 스티브의 발치로 핸드폰을 내던졌다. 처박힌 핸드폰이 반쯤 부서지자 페퍼는 미안하다는 듯 입을 가렸다.
-저런.. 튼튼하네요. 완전히 부서질 줄 알았는데.
-...토니는 어디 있습니까.
-토니라니, 소름 끼쳐요. 정 부르려면 스타크라고 해요.
아름다운 눈동자가 적의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토니의 최측근인 페퍼에게 자신이 달가운 존재는 아니겠지만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스티브가 다급히 커튼을 걷었다.
알 수 없는 기계로 가득 찼던 랩에 프라이데이와 커다란 침대만 놓여 있었다. 그리고 토니는 거기 모로 누운 채 감자칩을 와작 와작 씹고 있었다. 스티브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 순간 토니가 지직거리더니 순식간에 누웠다. 감자칩은 온데간데 없고 이번엔 치즈버거였다.
-..나도 저건 싫었죠.
페퍼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계를 고치는 토니가 나타났다. 열중한 얼굴엔 땀까지 맺혀 있었다. 페퍼는 스티브의 옆으로 나란히 섰다.
-토니 스타크답죠.
스티브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이게... 다 뭡니까.
-그의 천재성은 상상을 초월해요. 맘만 먹었으면 복제 인간도 만들었을 걸요.
-미스 포츠.
-소개하죠.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미래산업, 가상 비주얼이에요.
..가상? 이게 다 ..거짓이라고? 그럼..
-..그럼 토니는..
페퍼는 스티브를 말없이 노려보다 손에 들린 버튼을 눌렀다. 눈앞에 다시 토니가 있었다.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팔을 늘어뜨리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처음 보는... 아니. 처음은 아니었다. 절대 처음이 아니야, 저 눈.
-아마 이게 가장 최근 모습일 거에요. 가장.. 솔직한 모습이기도 하고.
가상의 토니가 정신을 차린 듯 미간을 찌푸렸다. 프라이데이. 이건 지워. 무색의 목소리였다. 페퍼는 괴롭게 입술을 물었다. 이 영상은 프라이데이를 뒤지던 비전이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프라이데이가 토니의 명령을 반만 따른 셈이었다. 지우긴 했지만 영구 삭제하진 않았으니까.
그 날 페퍼가 도착했을 때 로디는 울고 있었고 비전은 거의 제정신이 아닌 채로 프라이데이를 탈탈 털고 있었다. 토니는 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잠든 것 같았고 실제로도 잠든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깨어나기 힘들다는 점에서 잔다는 말은 태평한 소리였다.
토니는 이 일을 오래 전부터 계획했다. 로디에게 새 다리를 만들어주고 페퍼에게 회사를 넘기고 어벤져스의 귀환을 위해 사방팔방 뛰어 다닐 때부터. 자신의 갑작스러운 부재에 회사가 휘청이지 않도록 신기술이 자리잡을 시간까지 벌어주며 이 영상을 찍었다. 테스트 겸 말이다. 테스트가 완료되자 그는 스스로 의식을 놓았다. 인공심장을 3년에 맞춰 놓고. 그때쯤이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고 하셨어요. 모든 걸 순순히 털어놓은 프라이데이의 말에 페퍼는 울부짖으며 잠든 그에게 주먹을 들었다. 로디가 막지 않았으면 머리에 농구공이 생길 때까지 패줬을 거다.
페퍼는 가상 비주얼을 종료시켰다. 스티브는 차마 입을 열지도 못하고 주먹만 그러쥐고 있었다. 페퍼는 그를 차갑게 쳐다봤다. 처음부터 이 남자가 싫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환상적인 금발에 선하디 선한 블루아이, 게다가 토니가 캡틴이라고 부르면 얼마나 좋은 사람인 건지. ..캡틴. 그래. 그는 분명 캡틴이었다. 비전이 알아낸 토니의 기억 속에서도-토니는 두 가지를 간과했는데 아버지를 잃은 자식은 눈에 뵈는 게 없다는 것과 로디와 페퍼는 절대 비전을 말리지 않으리라는 거였다-마찬가지였다. 그의 선택이 옳았다. 하지만 그는 몰랐던 것이다. 토니 스타크가 어떤 인간인지. 그것만으로도 캡틴을 증오할 이유는 충분했다.
-토니는 한 때 알콜중독이었어요. 술 없이는 한 시간도 버티지 못했죠.
-!!!
-..역시 몰랐군요. ..하긴. 나도 그랬어요. 이상하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챘죠. 그 이유도요.
-......
-사람들은 죽음의 상인이 죽을 뻔하자 바로 장사를 접었다고 비난했지만 사실 그는 그 전부터 무기를 만들고 싶지 않아 했어요. 다른 방법을 찾길 원했죠. 그게 아이언맨이었고.
사람들이 죽고 있어. ..통제가 필요해.
-그가 웜홀 트라우마에 시달렸던 건 알아요? 슈트를 엄청나게 만들었어요. 랩에 처박혀서 자지도, 먹지도 않고.
내가 웜홀에 들어갔던 건 기억나? 그건 차원이 달랐어. 난 알아. 우리가 질 거야.
-팔라듐 중독으로 죽어갈 땐 또 어땠구요. 회사를 통째로 넘겨주고도 자기가 죽어간단 말을 못했어요. 아머를 입고 미친 짓이나 해댔죠. 로디에게 슈트를 주면서도 마찬가지였고. ..그래. 당신들을 만나고는 최소한 그런 미친 짓은 안 했어. 그 사람, 당신들을 은근히 자랑스러워 했으니까.
난 어벤져스가 해체되는 걸 막으려는 거야. 그러니까 제발!
-그는 최선을 다했어요. 그 최선이 틀릴 때마다 괴로워하면서도 끝내 멈추지 않았죠. ...이제 보니 확실하네요. 그래요. 당신들 때문이에요. 특히 당신. 당신 때문에 멈출 수가 없었던 거야. 자기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는 노친네라면서도 당신을 캡틴이라고 불렀으니까.
...알고 있었어? ...알았냐고!
-...축하해요, 캡틴. 당신이 그를 멈췄어요.
그 방패는 네 것이 아니야. 넌 자격이 없어.
-....말해주십시오. 토니는 어떻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매서운 손이 날아들었다. 따귀 정도야 캡틴 아메리카에게 파리가 앉은 정도일 텐데, 아팠다.
-다시 그 이름을 입에 올리면 슈트를 입고 가슴을 날려버리겠어. 당신이 토니에게 한 것처럼.
-...부탁입니다. 미스.
페퍼는 손자국조차 나지 않는 얼굴을 찢을 듯 노려보며 한 글자 한 글자를 또박또박 내뱉었다.
-토니 스타크는 죽었어.
스티브는 숨을 멈췄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스티브에게 페퍼는 한쪽 입고리를 비스듬하게 올리며 다시 한 번 비수를 꽂았다.
-죽었어. 이미.
-......
-그가 어떻게, 왜 죽었는지 당신은 평생 모를 거야. 절대 말해주지 않을 테니까.
매몰차게 돌아서는 페퍼를 멍하니 바라보던 스티브는 순간 1층까지 단숨에 뛰어 올라 페퍼를 잡으려 했지만 팔목에 닿기도 전에 벽에 내다 꽂혔다. 스티브는 숨을 고르며 앞을 쳐다봤다. 슈트를 입은 로디의 손에 익숙한 물건이 들려 있었다. 방패. 로디는 그것을 스티브의 발치로 내던졌다.
-...제임,
-갖고 가.
-..로즈. 그는...
-스티브 그랜트 로저스.
손바닥의 리펄서빔이 사납게 빛났다.
-여기서 나가. 마지막 경고야.
스티브는 고개를 떨궜다. 별이 새겨진 방패가 눈에 박혔다. 이걸로 아크리액터를 박살냈었다. 그는 ..목을 가렸고..
그는 내 친구야.
나도 그랬어.
스티브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제서야 온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어쩌면 ing
*스포 다량
*마블 초보주의
소코비아 협정은 유야무야 됐다. 2년 전쯤 완다 등이 수중감옥을 탈출했을 땐 무슨 빈.라덴이라도 살아 돌아온 것처럼 난리들이었지만 그 후 그들이 지명수배된 채로도 몇 번의 테러를 막아내자 급속도로 여론이 바뀐 것이다. 게다가 협정을 주도했던 와칸다가 발을 빼자 다른 나라들도 슬슬 말을 바꿔 지금은 폐기된 거나 마찬가지. 많은 나라에서 수배도 거의 풀린 상태다.
여기서 '거의'라는 건 다는 아니라는 뜻으로, 그들은 몇몇 국가에서 아직 범죄자였고 그 중 하나가 미.국이었다. 고국에서 거부 당하는 히어로라니. 아이러니하지만 여론이 워낙 어벤져스 쪽으로 기울어서 정부도 오래 버티긴 힘들 것이다.
히어로가 돌아오는 거다. 모두가 반기진 않겠지만.
**
페퍼는 히어로라면 진절머리가 났다. 멀리서나 멋있지, 가까이 있는 사람에겐 그거 왓더헬이다. 갑자기 집이 무너지질 않나, 납치 당해 실험실 개구리꼴 나지, 가끔 애인을 티비에서 만나기도 한다. 아령 대신 도시를 들고 있는 애인을 말이다. 게다가 그 애인이 토니 스타크라면 상황은 더 최악이 된다. 그는 죽어간단 말을 하는데도 사흘 밤낮이 필요한 머저리니까.
소코비아 사태 이후 페퍼는 더 견딜 수가 없었다. 토니는 억만장자에 천재 공돌이지만 슈트가 없으면 운동 좀 한 일반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슈퍼 히어로도 넘쳐 나는데 세상을 구할 때마다 트라우마를 훈장처럼 달고 오는 아저씨까지 머릿수를 채워야 하나. 하지만 토니는 끝내 슈트를 벗지 못했고, 페퍼는 결국 당분간 거리를 두자고 했다. 한 마디 잡지도 못하고 어깨만 축 늘어뜨리는 뒷모습에 쓴물이 올라왔지만 단호하게 돌아섰다. 그리고 기다렸다. 소코비아 협정, 어벤져스의 분열과 대립, 캡틴 등의 지명수배를 지켜 보며 몇 번이나 연락하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오만이었다. 그가 자신을 포기할 리 없다는 오만.
수중감옥 탈출로 한창 떠들석할 때 비전에게 연락이 왔다. '..미스 포츠. ..죄송하지만 잠깐이라도 좋으니 A타워에 들러주시지 않겠어요.' 토니는 바에 앉아 더티 마티니를 마시고 있었다. 토니..하고 부르자 천천히 돌아보던 순간을 페퍼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천하의 토니 스타크가 그런 눈을 하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양 무릎 아래가 철로 변한 로디(그에 대한 뉴스가 나오지 않아 페퍼는 로디의 사고를 몰랐다.)와 자비스의 목소리를 똑닮은 비전에게 뒷얘기를 듣고도 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로디는 토니의 유일한 친구였고 어벤져스를 그가 그만의 방식으로 좋아하고 아꼈다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그 눈빛은 지나쳤다. 페퍼는 자존심이고 뭐고를 따질 때가 아니라는 걸 직감하고 다시 토니 곁으로 돌아왔다.
토니는 언제 그랬냐는 양 활달하게 움직였다. 로디의 부상을 계기로 재활사업에까지 영역을 넓혔고 소코비아 수정안과 멤버들의 신원복구를 위해 일주일에 여덟 번씩 비행기를 타기도 했다. 술에 절어 있지도, 하루가 멀다하고 슈퍼모델을 침대로 끌어들이지도, 한 달씩 랩에 처박혀 있지도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멀쩡하고 침착했다. 전적이 전적인지라 한참을 지켜보던 페퍼가 다 안심할 만큼.
5개월쯤 지났을 때 페퍼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토니는 괜찮아졌고 원하던 대로 다시 아머를 입지도 않았지만 그들 사이의 달콤함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페퍼는 마지막으로 토니를 찾아 감정이 남은 것 치고는 꽤 쿨한 작별인사를 건넸다.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원나잇 상대 치울 때는 빼고.
순간 토니의 입술이 스치듯 쓸쓸하게 호선을 그렸다. 그땐 그게 자신의 미련인 줄 알았다.
-당신은 내게 과분한 여자였어. 하지만 잘 가라곤 못하겠는데.
-내가 사준 백을 내놔, 라고 할 건가요?
-아니. 더 많이 사라고 할 거야.
토니는 다시 CEO 자리를 제안했다. 자긴 편하게 공돌이 하면서 가끔 얼굴이나 비치겠다고.
-..혹시 또 죽어가요?
-오, 달링. 그랬다면 오믈렛이 있었겠지.
-......
-고민하지 마. 우린 좋은 사업 파트너잖아.
-보모가 맞겠죠.
-월급으로 스타크 인더스트리가 부족한가?
-한참.
-좋아. 포츠 인더스트리로 바꿔도 울지 않을게.
-진심이에요?
토니는 당장 변호사를 부르려고 했고 페퍼는 당신 이름으로 백만장자가 되겠다며 수락했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났을 때. 그녀는 혀를 깨물 만큼 후회했다. 대표 자리를 넘기자마자 토니가 회사 얼굴에 먹칠을 해서 페퍼가 가지고 있던 백마저 다 팔게 만들었냐면 그건 아니었다. 그는 명예이사, 그의 표현으론 얼굴마담 역활을 톡톡히 해냈고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주가는 연일 상승했다. 페퍼의 사업능력과 스타크의 이름값+공돌이 능력은 최강의 조합이었다.
그 일은 모든 게 좋았을 때 일어났다. 페퍼 체제는 성공적이었고 (몇몇 이사는 포츠만으로도 충분하다며 오만하고 즉흥적인 스타크를 아예 회사에서 내치자고 했다가 실업급여나 받게 됐다.) 로디는 강철 다리를 자기 것처럼 움직이게 됐으며 어벤져스 수배해제는 코앞이었다. 페퍼는 여느 때처럼 로스장관을 백 번쯤 욕하다가 커피잔을 깨먹은 더미를 구박하는 홀로그램 속 토니에게 주의를 주고 -애 좀 그만 울려요- 중.국 출장에 집중했다. 일정은 눈 코 뜰 새 없이 빠듯했다. 마지막 밤이 되어서야 개인 핸드폰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음성 메세지 1개. 듣지 않아도 토니였다. 믿기지 않지만 이 구식 핸드폰을 준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까. 첨단기술의 선두주자께서 이딴 골동품을 선물이라고 주고 종종 메세지를 남겼다. 내용은 주로 치즈버거에 관한 거였다. (내가 아직도 당신 비선 줄 알아요?! 는 씨알도 안 먹혔다.) 페퍼는 이번에도 치즈버거면 햄버거 가게를 백 개쯤 사버리겠다고 이를 갈며 버튼을 눌렀다.
[...미안해.]
페퍼는 벌떡 일어났다.
[프라이데이가 설명해줄 거야. 부수진 말아줘. 당신 주먹은 너무 세. 비전을 부탁해. 똑똑하지만 아직 애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어. 그리고 전해줘.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고마웠어 페퍼. bye.]
미친듯이 뛰는 심장을 누르고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미스 포츠.]
프라이데이였다.
-...토니는.
[......]
-프라이데이!! 토니는!!
[잠들어 계십니다.]
마이 갓... 신음하듯 중얼거리는 페퍼에게 프라이데이가 침착하게 덧붙였다.
[진정하세요. 아직 돌아가신 건 아닙니다.]
-..아직?
[전화로 말씀드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자세한 건 돌아오면]
페퍼는 당장 전화를 로디에게 돌렸다.
[페퍼, 출장 중 아니]
-지금 토니에게 가주세요. 빨리!!
로디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슈트를 입었다.
온갖 안 좋은 상상 속에서 도착한 말리부 저택은 조용했다. 날듯이 랩으로 뛰어 내려간 그는 맥이 풀려 주저앉았다. 강화유리에 비친 토니가 태연하게 홀로그램을 보고 있던 것이다.
-갓뎀.. 갓뎀 토니 스타크!! 페퍼까지 짜고 날 엿먹이다니!
수도승 생활이 질릴 때도 됐다고 생각은 했지만 질이 나빠도 너무 나쁜 장난이었다. 로디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나 돌아보지도 않는 저 뒤통수를 장렬히 후려치리라 씩씩대며 보안번호를 눌렀다. 그런데.
-...뭐야...
눈 앞의 토니가 사라져 버렸다. 토니 뿐만이 아니라 온갖 장비로 가득차 있던 랩이 거짓말처럼 깨끗해졌다. 내가 미친 건가.. 로디는 제 뺨을 찰싹 내리쳤다. 하지만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다급히 핸드폰을 꺼냈다.
-페퍼.
[가고 있어요. 토니는요?]
-이게 무슨...
-안녕하세요, 미스터.
불쑥 끼어든 프라이데이가 친절히 말을 이었다.
-당황하지 말고 숨을 길게 뱉으세요. 하나, 둘, 셋..
[무슨 일이에요!]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프라이데이가 숨을 쉬라는데.. 잠깐. 잠깐만. 프라이데이?
-예. 미스터.
-내가 올 걸 알았나?
-예상된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토니가 예상했다는 거다. 로디는 심장발작 직전인 페퍼를 진정시키고 최대한 침착하게 프라이데이에게 물었다.
-왜 내가 올 거라고 생각했지?
-미스 포츠가 연락하실 테니까요.
-토니가 그랬나?
-예. 미스터.
로디는 마른침을 삼키고 마지막 질문을 했다.
-토니는 어딨지.
**
캄캄한 밤. 말리부 저택에 한 그림자가 찾아 들었다. 경비 시스템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림자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저택은 조용했다. 마치 폐가처럼. 그림자에게서 가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무래도 스타크에게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안정을 되찾아 가던 그들에게 티찰라의 한 마디는 파장이 컸다.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이름. 완다는 눈에 띄게 불안해 했고 샘은 코 끝을 쓱 닦으며 고개를 돌렸다. 클린트는 특히 더했다. 수중감옥에서 토니에게 퍼부어 댄 걸 잊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스티브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시베리아에서의 일을 하루하루 곱씹으며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동아줄처럼 쥐고 살았다. 티비에서 보이는 토니의 멀쩡한 모습은 그나마 작은 위안이었다. CEO에서 은퇴한 이후로는 자주 볼 수 없는 게 아쉽긴 했지만 여전히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는데... '행적이 석연치 않아. 국내에서도 의심하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더군.' 얼마 후 토니 스타크가 건강상의 이유로 자택에서 요양 중이라는 스타크 사의 공식 보도문이 나왔을 때 스티브의 인내심은 바닥이 났다. 그래서 이성적인 캡틴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 수배가 풀리지 않은 조국에 발을 들이는 일을 하고 있는 거다.
티찰라의 도움으로 두 시간을 얻은 스티브는 다급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잠재웠다. 얼굴만, 얼굴만 보고 오는 거야. ..아니. 목소리까지만. 그래, 목소리까지만 듣자. 랩으로 한 발 한 발 내려갈수록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전시하듯 유리로 둘러싸여 있던 랩에 커튼이 쳐져 있었다. 스티브는 랩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1년 8개월만이었다. 그를 볼 수 있는 것이. 그리고 조심히 커튼을 잡았을 때.
띠리리리, 띠리리리.
스티브의 구식 핸드폰이 크게 울렸다. 스티브는 꺼야 한다는 생각도 못한 채 핸드폰을 내려다 봤다. 이 번호를 아는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그럼 그가 지금 저 안에서..
-역시 당신이었군요.
날카로운 목소리에 스티브는 번쩍 정신을 차렸다. 돌아보자 늘씬한 금발 미녀가 서 있었다. 아는 얼굴이었다. 페퍼 포츠. 페퍼는 핸드폰을 끊으며 다가섰다.
-이런 골동품을 가지고 있을 사람은 캡틴밖에 없을 것 같았죠.
-..미스 포츠. 그걸 당신이 왜..
-돌려 주려구요.
페퍼는 스티브의 발치로 핸드폰을 내던졌다. 처박힌 핸드폰이 반쯤 부서지자 페퍼는 미안하다는 듯 입을 가렸다.
-저런.. 튼튼하네요. 완전히 부서질 줄 알았는데.
-...토니는 어디 있습니까.
-토니라니, 소름 끼쳐요. 정 부르려면 스타크라고 해요.
아름다운 눈동자가 적의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토니의 최측근인 페퍼에게 자신이 달가운 존재는 아니겠지만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스티브가 다급히 커튼을 걷었다.
알 수 없는 기계로 가득 찼던 랩에 프라이데이와 커다란 침대만 놓여 있었다. 그리고 토니는 거기 모로 누운 채 감자칩을 와작 와작 씹고 있었다. 스티브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 순간 토니가 지직거리더니 순식간에 누웠다. 감자칩은 온데간데 없고 이번엔 치즈버거였다.
-..나도 저건 싫었죠.
페퍼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계를 고치는 토니가 나타났다. 열중한 얼굴엔 땀까지 맺혀 있었다. 페퍼는 스티브의 옆으로 나란히 섰다.
-토니 스타크답죠.
스티브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이게... 다 뭡니까.
-그의 천재성은 상상을 초월해요. 맘만 먹었으면 복제 인간도 만들었을 걸요.
-미스 포츠.
-소개하죠.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미래산업, 가상 비주얼이에요.
..가상? 이게 다 ..거짓이라고? 그럼..
-..그럼 토니는..
페퍼는 스티브를 말없이 노려보다 손에 들린 버튼을 눌렀다. 눈앞에 다시 토니가 있었다.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팔을 늘어뜨리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처음 보는... 아니. 처음은 아니었다. 절대 처음이 아니야, 저 눈.
-아마 이게 가장 최근 모습일 거에요. 가장.. 솔직한 모습이기도 하고.
가상의 토니가 정신을 차린 듯 미간을 찌푸렸다. 프라이데이. 이건 지워. 무색의 목소리였다. 페퍼는 괴롭게 입술을 물었다. 이 영상은 프라이데이를 뒤지던 비전이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프라이데이가 토니의 명령을 반만 따른 셈이었다. 지우긴 했지만 영구 삭제하진 않았으니까.
그 날 페퍼가 도착했을 때 로디는 울고 있었고 비전은 거의 제정신이 아닌 채로 프라이데이를 탈탈 털고 있었다. 토니는 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잠든 것 같았고 실제로도 잠든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깨어나기 힘들다는 점에서 잔다는 말은 태평한 소리였다.
토니는 이 일을 오래 전부터 계획했다. 로디에게 새 다리를 만들어주고 페퍼에게 회사를 넘기고 어벤져스의 귀환을 위해 사방팔방 뛰어 다닐 때부터. 자신의 갑작스러운 부재에 회사가 휘청이지 않도록 신기술이 자리잡을 시간까지 벌어주며 이 영상을 찍었다. 테스트 겸 말이다. 테스트가 완료되자 그는 스스로 의식을 놓았다. 인공심장을 3년에 맞춰 놓고. 그때쯤이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고 하셨어요. 모든 걸 순순히 털어놓은 프라이데이의 말에 페퍼는 울부짖으며 잠든 그에게 주먹을 들었다. 로디가 막지 않았으면 머리에 농구공이 생길 때까지 패줬을 거다.
페퍼는 가상 비주얼을 종료시켰다. 스티브는 차마 입을 열지도 못하고 주먹만 그러쥐고 있었다. 페퍼는 그를 차갑게 쳐다봤다. 처음부터 이 남자가 싫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환상적인 금발에 선하디 선한 블루아이, 게다가 토니가 캡틴이라고 부르면 얼마나 좋은 사람인 건지. ..캡틴. 그래. 그는 분명 캡틴이었다. 비전이 알아낸 토니의 기억 속에서도-토니는 두 가지를 간과했는데 아버지를 잃은 자식은 눈에 뵈는 게 없다는 것과 로디와 페퍼는 절대 비전을 말리지 않으리라는 거였다-마찬가지였다. 그의 선택이 옳았다. 하지만 그는 몰랐던 것이다. 토니 스타크가 어떤 인간인지. 그것만으로도 캡틴을 증오할 이유는 충분했다.
-토니는 한 때 알콜중독이었어요. 술 없이는 한 시간도 버티지 못했죠.
-!!!
-..역시 몰랐군요. ..하긴. 나도 그랬어요. 이상하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챘죠. 그 이유도요.
-......
-사람들은 죽음의 상인이 죽을 뻔하자 바로 장사를 접었다고 비난했지만 사실 그는 그 전부터 무기를 만들고 싶지 않아 했어요. 다른 방법을 찾길 원했죠. 그게 아이언맨이었고.
사람들이 죽고 있어. ..통제가 필요해.
-그가 웜홀 트라우마에 시달렸던 건 알아요? 슈트를 엄청나게 만들었어요. 랩에 처박혀서 자지도, 먹지도 않고.
내가 웜홀에 들어갔던 건 기억나? 그건 차원이 달랐어. 난 알아. 우리가 질 거야.
-팔라듐 중독으로 죽어갈 땐 또 어땠구요. 회사를 통째로 넘겨주고도 자기가 죽어간단 말을 못했어요. 아머를 입고 미친 짓이나 해댔죠. 로디에게 슈트를 주면서도 마찬가지였고. ..그래. 당신들을 만나고는 최소한 그런 미친 짓은 안 했어. 그 사람, 당신들을 은근히 자랑스러워 했으니까.
난 어벤져스가 해체되는 걸 막으려는 거야. 그러니까 제발!
-그는 최선을 다했어요. 그 최선이 틀릴 때마다 괴로워하면서도 끝내 멈추지 않았죠. ...이제 보니 확실하네요. 그래요. 당신들 때문이에요. 특히 당신. 당신 때문에 멈출 수가 없었던 거야. 자기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는 노친네라면서도 당신을 캡틴이라고 불렀으니까.
...알고 있었어? ...알았냐고!
-...축하해요, 캡틴. 당신이 그를 멈췄어요.
그 방패는 네 것이 아니야. 넌 자격이 없어.
-....말해주십시오. 토니는 어떻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매서운 손이 날아들었다. 따귀 정도야 캡틴 아메리카에게 파리가 앉은 정도일 텐데, 아팠다.
-다시 그 이름을 입에 올리면 슈트를 입고 가슴을 날려버리겠어. 당신이 토니에게 한 것처럼.
-...부탁입니다. 미스.
페퍼는 손자국조차 나지 않는 얼굴을 찢을 듯 노려보며 한 글자 한 글자를 또박또박 내뱉었다.
-토니 스타크는 죽었어.
스티브는 숨을 멈췄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스티브에게 페퍼는 한쪽 입고리를 비스듬하게 올리며 다시 한 번 비수를 꽂았다.
-죽었어. 이미.
-......
-그가 어떻게, 왜 죽었는지 당신은 평생 모를 거야. 절대 말해주지 않을 테니까.
매몰차게 돌아서는 페퍼를 멍하니 바라보던 스티브는 순간 1층까지 단숨에 뛰어 올라 페퍼를 잡으려 했지만 팔목에 닿기도 전에 벽에 내다 꽂혔다. 스티브는 숨을 고르며 앞을 쳐다봤다. 슈트를 입은 로디의 손에 익숙한 물건이 들려 있었다. 방패. 로디는 그것을 스티브의 발치로 내던졌다.
-...제임,
-갖고 가.
-..로즈. 그는...
-스티브 그랜트 로저스.
손바닥의 리펄서빔이 사납게 빛났다.
-여기서 나가. 마지막 경고야.
스티브는 고개를 떨궜다. 별이 새겨진 방패가 눈에 박혔다. 이걸로 아크리액터를 박살냈었다. 그는 ..목을 가렸고..
그는 내 친구야.
나도 그랬어.
스티브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제서야 온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어쩌면 ing
'dukudk'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영시진/ 명주모연 (14) | 2016.06.05 |
---|---|
대영시진/ 명주모연 (12) | 2016.05.26 |
대영시진/ 명주모연 (20) | 2016.05.08 |
대영시진/ 명주모연 (22) | 2016.05.01 |
대영시진/ 명주모연 (14) | 2016.04.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