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술집


군대에서 일주일 휴가란 전생에 나라를 일곱 번 구해야 주어질까 말까 한 일이다. 게다가 5분 대기조 알파팀이면 나라가 아니라 지구를 구한대도 어렵다. 쉴 새 없이 울려대는 카톡이 그 방증으로, 십 육시 이 십분 현재. 최중사와 임중사, 공하사는 자기네 팀장이 심각하게 아픈 거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서상사 외근 나갔나 보다. 시진은 심드렁하게 턱을 괸 채 핸드폰에서 시선을 옮겼다.

-더 마실 거에요?
-시작도 안 했어요. 이모. 여기 소주 한 병 더요.

즐거운 휴가는 아니지만 어쨌든 휴가는 휴가니까 즐기자!는 다짐은 만 하루도 안 돼서 그른 것 같다. 한 시 넘어 모연에게서 걸려온 전화가 어째 목소리부터 심상치 않다 싶더니 대낮부터 술집 직행. 게다가 앉혀놓고 한 잔도 못 마시게 한다. 소주 네 병째 따면서도 의사는 의사다. 시진은 벌컥 또 한 잔 들이켜는 모연을 따라 소주잔을 홀짝였다. (물이다, 물.)

-이거 가혹행윈데.
-가혹한 게 상처 덧나는 거보다 나아요.
-진짜 안 취했네. 그 의대는 음주가 필수전공입니까?
-제가 수석이죠.
-진짜요? 윤명주보다 세다구?
-..이모! 술!

성화를 부리다 사장님께 기어이 등짝을 맞는 모연을 보며 시진은 확신했다. 윤명주 맞구만.

-그새 싸웠어요?
-생각 중이에요. 싸울지 말지.
-술 마시면 뇌가 잘 안 돌아가는데. 내가 대신,
-삼 박 사일 입원하고 일주일 병가 받은 사람은 못 마시게 돼있어요, 법이.
-그거 강모연 법이죠.
-상식있는 의사면 다 지키는 법이거든요.
-술 고픈 사람 불러놓고 자기 혼자 마시는 게 상식있는 의사였구나.
-...안주 더 시킬까요? 여기 골뱅이도 맛있는데.
-비빔국수랑 감자전.
-..안 시켰으면 울 뻔했네요. 이모, 여기
-잠깐잠깐! 메뉴판 좀 다시 보구요. 여기 어디 더 비싼 게 있었는데.

제일 싼 것만 골라놓고 비싼 거 타령이다. 모연은 피식 웃으며 시진의 잔을 반만 채웠다.

-봐줬다. 대신 딱 이것만 마시는 거에요?
-주는 김에 꽉 채워주지.
-싫음 말구요.
-누가 싫대요, 누가. 데려와요. 내가 그냥,
-그냥 마셔요. 건배.

두 잔의 술이 부딪치고 넘어간다. 시진은 크흐 목을 울리고 김치찌개를 떠먹으려다가 빤한 시선에 숟가락을 멈췄다.

-왜요? 
-고마워서요.
-잘 생겨서가 아니고?
-그것도 맞고.

시진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이제야 알겠다는 듯 침통해진다.

-나 때문이군요...
-네?
-미안합니다. 하지만 나는 애인이 있어요. 자꾸 이러면 안 됩니다..

모연의 눈이 가늘어진다.

-너만 보면 자꾸 난 마음이 안 흔들리거든요.
-난 또. 내가 애인이 있는 게 자꾸 후회가 되는 줄 알았죠.
-진짜 언제적 노래를. 대위님 요즘 노래 하나도 모르죠.
-제가 레.드벨벳을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아십니까?
-와. 이거 녹음해서 서상사님 들려드려야겠다.
-서상사가 더 좋아합니다. 그러고 보니까 화나네. 나야 걸그룹이야.
-유대위님은요.
-다시 유대위님이네요? 친구하기로 해놓고.
-여전히 말 돌리시구요.

동시에 웃음이 터져 나온다. 모연은 웃음 끝에 길게 한숨을 쉬며 소주를 따랐다.

-제가 친구 하난 잘 뒀네요. 머리속이 터진 만두 같았는데. 기분 나아졌어요.
-제 특기죠.
-진심이에요. 고마워요. 다짜고짜 불러냈는데도 나와주고 아무 것도 안 묻고 농담도 해주고.
-듣는 것도 잘합니다. 원하면.

모연의 얼굴이 한참 동안 조금씩 가라앉는다.

-..친구가 있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나한텐 친구고 언니고 엄마인 앤데, ..명주를 만났대요. 어제도 아니고 삼일 전에.

무슨 애기 안 해?
무슨 애기? 아~ 이사장이 나 꽃집 차려 주고 있는 거? 열심히 돌려보내고 있어. 나보다 이쁜 꽃이 없더라구.
...입 무겁네.
누구? 나?
...그래서. 오늘 아침에 해는 뜨디. 지나가는 누군가한테 환상적인 미소는 보여줬고.
뭐라는 거야.
윤명주가 그러더라. 그런 식으로 유치할 거라고.
!!!
..놀라지 마. 겁먹지도 말고. 몰랐던 것도 아니고 말릴 생각은 이제 없으니까.
.....
주제 넘어도 뻔하게 한 소리 했어. 뻔하지 않은 대답 들었고. 안심되더라. ..미안했다고 전해줘. 아침저녁으로 안부문자는 그만하라고 하고. 시어머니 코스프레 그날로 끝났으니까 술이나 한 잔 하자. 셋이.

-... 난 모르겠어요. 화를 내야 하는 건지 기뻐해도 되는 건지 미안한 게 먼전지... 아니. 화도 나고 미안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데 ..슬퍼요. 말해도 되는 거잖아요. 나한테 말했음, 말해줬음 그런 힘들고 무거운 자리에 혼자 있게 안 했을 텐데. ..그래놓고 나한테 한 마디도 안 했어. 그게 날 위하는 게 아닌데. 좋은 것만 같이 하고 무겁고 어려운 건 혼자 하라고 손잡은 거 아닌데... 바보 멍청이..

시진은 물기배인 눈동자를 바라보다 빈 잔으로 고개를 숙인다.

-.. 아마 강선생이 너무 좋아서 그랬을 겁니다. 그게 최선이고 진심이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가서 말해주십시오. 이럴 땐 기대는 거라고. 손 내밀어도 된다고. 같이 하자고. ..화도 내요. 화를 내도 미안해해도 기뻐해도 명주는 괜찮을 겁니다. 강선생밖에 모르는 녀석이니까.

끝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모연이 ..조금 부럽다면 너무한 걸까.
솔직한 것만이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솔직하고 싶을 때조차 입을 닫아야 하는 건 역시 조금 아프다. 서로 이해하고 있는 이유라고 해도 그 사람은 아플 테니까.
시진은 고개를 돌렸다. 어두워진 창밖으로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다. 올해의 첫 봄비였다.


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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